2009년 7월 23일 목요일

방독면 구보

1. 아주 오랜만에... 97년 여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12년 만에 방독면을 쓰고 구보를 해보았다. 소감부터 말하자면

씨발 뛰다가 뒈지는 줄 알았다.

2. 예전부터 방독면 쓰고 한번 뛰어봐야지 생각은 했는데 마땅히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일단 쓰고 뛸 방독면이 없었다. 90년대 연대 앞에 살 때는 집안에 K9 방독면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지나니까 망가지더라. 게다가 한국군이나 미군용 방독면을 쓰고 뛰다가 누가 신고 때리면 얄짤없이 군용 현용품 불법 소유/사용으로 벌금을 먹기 때문에 영 좋지 않다.

그런데 3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엑사이팅 굿즈 전문점인 빌리지 뱅가드 시모키타자와점에서 러시아군 T82 방독면을 꽤 괜찮은 가격에 파는 것이다. 신난다 하고 가져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점원이 방독면 케이스의 도난방지용 플라스틱 탭도 안 뗀 상태로 물건을 포장해 줬다. 뭐 이래. -_- 이거 어떻게 떼야 하지? 아무 가게나 가서 이거 좀 떼주세요 그래야 하나.

구 러시아군용 방독면이니 현행법에 위반될 걱정도 없다. 안심하고 써봤는데... 얼굴 부분을 덮어주고 조절끈으로 조여주는 미군/한국군용 방독면과 달리 이 러시아군용 방독면은 머리에 뒤집어쓰는 고무 재질이라 엄청 머리를 조인다. 러시아인들 두상이 한국인보다 작으니 거기에 맞춰 만든 걸 한국인이 편안히 쓰는 건 무리가 있다. 아니, 러시아인들도 별로 편하게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도대체 이런 디자인은 누가 생각해내는 거야. 그래도 스타일 하나 만큼은 독보적이다.

머리에 딱 맞는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숨을 쉬어보니... 숨이 안 쉬어진다! 방독면이 오래 된 것인지 필터가 작동을 안 하는 건지 공기가 순환되지가 않는다. 갑갑해서 방독면을 벗으려고 했는데 머리에 딱 맞아서 벗겨지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생지옥의 기분이었다. 이대로 만화책과 게임이 널부러진 방 안에서 러시아군 방독면을 쓴 채 똥오줌을 싸고 질식사한 시체로 발견되어야 하나 공포와 고통에 휩싸여 있다가 간신히 방독면을 벗었다. 그 뒤로 이 물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파는 가게 특성 상 실용품이 아니라 인테리어용 소품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보니, 호흡구 부분에 고무 커버가 씌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이걸 뽑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거구나. 커버를 뽑아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뒤집어써보고... 스-하- 스-하- 오 제대로 작동된다. 이래서 모든 제품은 메뉴얼이 중요해.

3. 그냥 뛰다가는 골로 가기 좋기 때문에 한 달 동안 체력을 업그레이드했다.자전거만 타면 무릎과 발목이 부드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이틀에 한 번씩 1시간 정도 뛰면서 하체를 단련하였다. 폭우로 인한 한강 진창 사태도 복구가 되었고... 드디어 날을 잡았다.

Today is the day!

4. 아침에 일어나 고구마와 토마토를 먹고, 면도를 했다. 방독면을 쓰기 전엔 턱수염을 깨끗하게 밀어야 한다. 그래야 방독면이 피부에 제대로 밀착되기도 하고, 방독면 고무면에 수염이 쓸려서 피부를 아프게 하지도 않는다. 퍼플 계열 칼라의 옷으로 복장을 맞추고 메신저 백에 방독면과 캐멀백 750ml 물통을 넣은 뒤 암밴드에 아이팟 셔플을 채우고 집을 나섰다. 두근두근하네요.

7월 23일 정오 기온 29도. 아이 좋아 *^^*

상수동 한강 산책로로 걸어가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방독면을 써봤다. 으 뜨겁다. 조금이라도 멀쩡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후드를 뒤집어 쓰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리에 속도를 붙인다. 사실 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제는 호흡과 불쾌감이다. 숨을 쉴 때마다 방독면이 얼굴에 달라붙는다.

10분 정도 뛰니까 내가 씨발 이 짓을 왜 해야 하나 하는 후회가 미칠듯이 몰려온다. 러시아군용 방독면은 러시아인의 두상에 맞춰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국인이 쓰면 머리를 꽉 죈다. 다행히 내가 산 녀석은 그럭저럭 쓰는 건 가능했는데, 턱 부분이 엄청나게 조인다. 뭐라 말을 하려다가 혀 깨물 뻔 했다. 덕분에 중간중간 구보가를 부르거나 구령을 붙이는 건 포기. 하악이 약한 사람이나 교정 중인 사람은 절대로 써선 안될 거 같다. 뭐 쓰다가 턱 나가면 그것도 인생의 한 페이지겠지.

30분 정도 뛰니까 이제 좀 뛸만하다. 턱이 아프고 필터 때문에 얼굴이 자꾸 쳐지는 게 힘들긴 하지만 숨쉬는 건 어렵지 않다. 렌즈에 김이 서리는 현상도 호흡만 잘 컨트롤하면 금방 정리된다.

뛰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 뛰니까 그래도 아주 못할 짓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걸 혼자 재미삼아 하니까 할만한거지, 하루에 3시간도 못 자고 고참들한테 갈구림 당하고 출동 나가서 시위대랑 싸우고 암기사항 외우고 스트레스 받으며 뛰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는 게 다행이다.

1시간을 뛴 다음 방독면을 벗었다. 방독면 안에 차있던 땀이 촤악 하고 땅바닥에 뿌려지는 소리가 짜릿한 자극이 되어 청각을 때려주었다. 뜨거운 고무에 맞닿아 있던 얼굴과 머리에 차가운 강바람이 닿으니 소름끼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 상태에서 맥주 한 캔을 원샷하면 아마 그 자리에서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포대교를 넘다가 인증샷. 보급품 진압장갑이 너무 크다. 어디서 작은 사이즈로 한 켤레 구해야 할텐데...

5. 아이팟에는 구보에 적합한 음악들을 채워 넣었다.

(1) Run the Cadence with the U.S. NAVY - 역시 구보에는 미군 런닝 카덴스다. 사람 뛰게 하는 재주가 있는 노래들이다. 요즘 특히 좋아하는 노래는 'I wanna be a Navy Pilot'이다. '난 해군에 들어가면 F14 파일럿이 될 줄 알았어 ㅠㅠ' 이런 내용인데 뭐... 실상은 갑판에서 카페인 알약 씹어먹으며 Mk.82 갈아끼우며 존나 뛰어다니는 거지.
(2) Zuntata - Daddy Mulk - 우우우우~~~ 뛰기에 딱 좋다.
(3) 카라 - 뷰티풀 걸 - 가사 중에 '나와 맞는 옷에 또 받쳐주는 말투'. 전의경 받치는 기수들이 꼭 기억해야 할 가사다.
(4) 미히마루 GT - I should be so lucky - 요즘 내 상황하곤 좀 안 맞는 노래다만...
(5) TRF - Survival dance - 고인의 음악적 수준에 다시 한번 감동하게 됩니다.

6. 이런 짓은 자주 할 게 아니다. 앞으로 또 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스트래칭한 다음에 집에 와서 샤워하고 냉면 만들어 먹으니 죽이는군... 최근 한 달 동안 내 인생에 있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Damn.



Tacticat 09072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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