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2일 수요일

의경 구보에 대한 단상 (1)

0. 구보는 런닝이며 또한 런닝이 아니다.

1. 의경 지원자들이 맨 처음 가는 곳은 육군 훈련소이다. 1995년에 내가 갔던 곳은 육군 52사단 신병훈련소였다. 시기에 따라서 논산에 가기도 하고 어디 다른 보충대를 가기도 하고 그런 모양이다.
육군 훈련소 기간은 4주 밖에 안 되고 훈련내용도, 다른 육군 훈련에 비하면 난이도가 한 단계씩 낮은 수준으로 평가되는 것이 보통이다. 훈련병들은 '우린 육군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훈련소 기간병들도 '육군도 아닌 놈들'이란 생각으로 대단한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기간 중 기초체력을 다지기 위해 아침 점호 때마다 행해지는 아침 구보 역시 별 거 없다. 사회에서 담배 피던 녀석들이 담배로 인한 폐활량 저하를 핑계로 질질 끌리기 시작하면 다른 녀석들도 은근슬쩍 못 뛰는 척 하면서 비루한 모습을 보여주며 구보 속도를 늦추고 전체적 분위기를 다운시키기 때문이다.

2. 그 다음 교육순서인 경찰학교에 가면 이제부터는 경찰 교육을 받는다라는 기분 탓인지 조금 나아지는 듯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경찰학교 특유의 그 가당찮은 널럴함에 젖어서 민간인 이하의 나태함을 보이게 된다. 경찰학교 구보는 적보산의 맑은 공기와 기율교육대의 한기 덕분에 몸의 컨디션을 높혀준다. 사람 만드는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의경 지원자들은 '어차피 가면 순찰 도느라 걸어다니기만 하고 서서 딱지 끊고 하느라 뛸 일도 없는데 뭐'라는, 대단히 나태한 사상에 젖어있다.

3.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의경 지원자들이 가게 되는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는 뛸 일이 무척 많다. 일단 술담배와 온라인 게임에 젖어 물렁물렁한 몸으로는 시위진압은 커녕 시위대에게 머릿가죽 벗겨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기 때문에 체력 업그레이드에 상당한 시간을 소요한다. 당장 화염병 날아오는 시위현장에 나갈 일이 없다 해도 시위진압 훈련을 받는 데에만도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보를 기본으로 한 체력 업그레이드 훈련은 필수이다.
게다가 육군 훈련소나 경찰학교의 맑은 공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더러운 도시를 빨면서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에 자대에서의 구보는 난이도가 더욱 높다.
영화 킬러들의 수다에서 신현준이 연기한 캐릭터가 총을 든 검사에게 쫓기는 상황을 맞아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 사내놈은 잘 뛰어야 한다고 해준 말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은 누굴 잡기 위해서도 잘 뛰어야 하지만 누군가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도 잘 뛰어야 한다.
경찰이 시위현장에서 시위대를 잡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작전이 제대로 안 돌아가거나 기습에 허를 찔리면 죽어라고 도망가야 하는데 이때 제대로 못 뛰어서 뒤쳐지면 무슨 일에 처할지 모른다. 두꺼운 방석복과 헬멧을 쓰고 방패까지 들고 뛰는데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시위대에게 안 잡힐 수 있을까? 안 잡혀야 한다. 그럴려면 정말 잘 뛰어야 한다. 처음엔 못 뛰는 척 뺑끼쓰면 고참들도 나 고문관이라고 포기하고 힘든 거 안 시켜주겠지 하면서 요령피울 생각만 하던 녀석도 시위상황에서 제대로 못 뛰어서 험한 꼴 당하는 광경을 몇 번 보고나면 자기 몸이 아까워서라도 잘 뛰게 된다.

4. 비단 시위현장이 아니더라도 의경들은 잘 뛰어야 한다. 경찰차나 오토바이로 범인을 추적하는 건 직원 경찰들의 몫이고 뛰어서 쫓아가는 건 의경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소매치기나 강도, 상해범 등 다양한 사람들을 뛰어서 쫓아가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외진 곳에서 순찰을 돌다가 마약에 취해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나 폭주족들에게 잡혀 죽지 않으려면(과장된 비유가 아니다) 죽어라고 뛰어서 도망가야 한다. 경찰이 도망가냐고? 그런 비난도 살아있어야 먹을 수 있는 거다.

5. 이런저런 이유로 구보훈련은 참 빡세게 하는데, 주요 기동대의 경우 오늘은 몇 키로 뛴다 오늘은 몇 바퀴 뛴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오늘은 1시간 뛴다' 이렇게 시간 단위로 구보를 묶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벌써 10년이 넘었네. 서울청 기동단(현 기동본부)에 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 마침 당시 1기동대 O중대가 구보훈련 중이었는데 방석복에 각반까지 찬 상태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었다. 저 아저씨들 앞으로 몇 바퀴나 남았대? 아마 몇 바퀴가 아니고 그냥 몇십 분 남아있을 겁니다 하는 대답에 좌절.

한참을 뛰다가 대열 중간 쯔음에서 뛰던 대원 한 명이 다리가 풀리더니 앞으로 쓰러지려는 모습이 보였다. 오 저런 옆으로 내보내서 쉬게 한 다음에 나중에 한 소리 하겠네 했더니 쓰러지려는 대원 양옆에 서있던 대원 두 명이 양팔을 잡아서 들고, 그대로 뛰는 것이다. 마치 시위자 체포하는 2:1 체포술 하듯이 들고 그대로 뛰는데 구보 속도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소대 챙기는 기수로 보이는 대원이 가더니 질질 끌려가는 대원에게 가서 정신차리라고 뺨을 때려대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니까 질질 끌려가던 대원이 정신을 차린(?) 듯 다시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양옆의 대원들이 잡고 있던 팔을 놔주고, 뺨을 때리던 대원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에 다리가 풀리던 순간부터 다시 원상태가 돌아가던 순간까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눈을 돌리지도 않고 속도가 느려지지도 않았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계속 뛰는 모습에 우리는 '아 저기 갔다간 난 그냥 뒈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 당시 고참들은 우리도 저렇게 되야 한다며 애들을 조져서 강한 중대로 만들자는 둥 미친 소리를 해대는 통에 한동안 참 피곤했던 게 기억난다.

6. 저렇게 죽어라고 뛰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뛰다가 뒤쳐지면 무슨 일에 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8일 탈레반의 홈페이지에 그들이 생포한 미군 병사의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에서 아프간 동부 기지에 파견되어 근무 중이던 보비 버그달 이병은 정찰 도중 일행에 뒤쳐지면서 납치되었다고 자신의 정황을 설명하였다. (자세한 상황에 대해선 모르겠지만)그 소식을 들었을 때도 뛰다가 뒤쳐져서 결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맞이해야 했던 몇몇 경우들이 떠올랐다.
요즘은 무최루탄 원칙으로 최루탄이 사용되지 않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최루탄 사용은 흔한 일이었고 최루탄이 사용되지 않아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시위현장에서는 방독면을 착용해야 했다(자기네가 최루탄을 쓸지 안 쓸지도 모르면서 일단 방독면을 쓰고 본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개념인가?). 방독면을 쓰면... 힘들다. 정말 힘들다.그냥 가만 있어도 힘들다. 그런데 방독면을 쓰고 뛰어다니면 더욱 힘들다. 하지만 '아 정말 힘드니 난 이제 그만 뛰어야 겠다', 이렇게 편안한 발상을 가지고 있다간, 이번 글에서 몇 번을 써먹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
그래서 한 여름에 방독면 구보도 많이 했었다. 왜 꼭 사람 잡는 한 여름에 그 짓을 했냐 하면, 시위도 여름에 많이 하기 때문이다. 가장 더운 8월 중간의 8.15가 되면 그 날을 앞뒤로 시위 스케쥴이 차고 넘쳐서 경찰 출동 스케쥴이 올 부킹된다. 그러면 방독면하고 같이 사는 거다.
물론 육군이나 해병대처럼 방독면을 쓴 채로 미숫가루를 탄 물을 급수관으로 마시며 식사까지 해결하는 강한 훈련은 안 받지만 여름에 방독면 참 지겹게 쓰고 그 상태로 참 지겹게 뛰어다녔었다.

다시 하라면? 당연히 절대 못 하지.

이젠 한 여름에 버프 쓰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No more chemical mask!

Tactica 090722 1849

댓글 2개:

익명 :

딥장군입니다(계속 익명 아니면 안달리는..)

예전에 부산대 전담 마크인 금정경찰서 전경 선배가 마킹할 대학이 없는 동래 경찰서 전경이 젤 빠졌다고..

서울에 행사(?)에 출동해서 구보로 이동하다 죄다 퍼졌다는 전설이..

Tacticat :

저런. 그래도 부산은 야구 훌리건이 많아서 그거 막으러 다니면 나름 레벨업할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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